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강렬한 전투의지 === 이 전투는 승리할 가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전투였다. 조선 수군은 규모가 기존의 1/10 이하로 급감해 더이상 화력으로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없었으며, 육지는 이미 일본군이 물밀듯이 쇄도하는 도중이라 편안한 정탐과 보급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순신의 장기인 정보전을 통한 각개격파도 불가능했고,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데다 시간도 많이 남지 않은 일본군이 정면 대결을 걸어왔기에 지연전도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함선이 훨씬 빠르므로[* 일본의 배는 깊은 바다에서 속도를 내기 위해 뱃바닥이 뾰족한 세형선이라 물의 저항을 덜 받으므로, 얕은 바다를 다니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제작된 판옥선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대신 선회력에선 세키부네가 더 열등하기에 명량 해전에서 후퇴하는 세키부네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주 가능성조차도 불확실하지만 막강한 백병전 능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이 서해로 보급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했으므로 애초에 도주를 선택할 수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순신 본인조차 전투 전에는 고뇌에 휩싸여 절망적 심기를 토로하고 있었다. >9월 3일 (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9월 12일 (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개인적인 불안감은 숨긴 채 전투의지를 잃지 않고 임금에게는 "신이 아직 살아있고 전선 12척이 있으므로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의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아군에게는 군령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함과 동시에 적은 병사로도 중요한 길목을 지키면 대군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로 격려했다. 지치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정예병들 이외의 모든 무기를 잃은 조선 수군이었지만, 그런데도 이순신은 끝끝내 강점을 활용하고 약점을 가릴 방법을 찾아냈으며 큰 전략적 시각에서 본인이 물러서면 전쟁이 패전으로 끝난다는 판단 하에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또한 극단적인 전장 환경을 이용해 전투 전개까지 극단적으로 몰아가 정상적인 전투가 진행되기 어렵도록 만들어 끝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야말로 이순신의 천재성과 함께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가 빛났던 전투이며, 먼 훗날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바보같은 삽질]] 때문에 가끔 폄하되기도 하는 의지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작용한 전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